역사의 현장 다하우(Dachau) 나치 강제 수용소 [다하우 독일여행 39]

2025. 12. 4. 08:36독일 여행

 

다하우 강제 수용소(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KZ) Dachau)는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서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곳이다. 이 수용소는 남부 독일의 뮌헨 북서쪽

약 16킬로미터(10마일) 떨어진 다하우라는 중세풍 마을 근처 버려진

군수품 공장의 대지에 세워졌다.

더욱 큰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함께,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다.

 

1933년 3월 22일에 개설된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우파 정당들인 가톨릭 중앙당과 나치당 간의 연립 정권

(1933년 7월 6일에 해산되었다)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정식 수용소였다. 뮌헨 지역 경찰청장 하인리히 힘러

공식적으로 수용소를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설명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뒤이은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원형(prototype)이 되었다. 수용소 운영 조직의 기본 및 수용소 형태 뿐만

아니라 수용소 건축 계획까지 테오도어 아이케(Theodor Eicke)가 개발했으며, 이 사항들은 모든 후대 수용소에도 적용되었다.

아이케는 수용소 경비본부 근처에 분리된 보안 기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거주 구역, 관리 시설, 경비대 기지로 구성했다.

아이케 자신은 그가 만든 모델을 다른 수용소에 적용하는 책임을 맡아 모든 강제 수용소를 총괄 감독하게 되었다.

 

총계 30개국 이상 20만 명의 죄수들이 다하우에 수감되었다. 그중 1/3 이상은 유대인이었다. 질병영양실조자살 등 사유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25,613명, 보조수용소에서도 거의 1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1945년 초, 티푸스 전염병이 수용소에 만연했으며, 몸이 약한 수많은 죄수가 죽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영국 또는 미국 군대에 의해 2번째로 해방되어 서방 세계가 나치즘의 잔인성을 뉴스영화나 언론인의 직접

취재를 통한 보도로 알게 된 최초 장소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수용소는 2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용소 구역과 화장터였다. 수용소 구역은 32개의 막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반나치체제적인 개신교 목사들과 의학 실험 대상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옥사와 조리장 사이 안뜰은 죄수에 대한 즉결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수용소는 전기 철조망 출입구, 배수로와 7개의 감시탑이 포함된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37년 초, 죄수 노동력을 착취하던 친위대(SS)는 원래 수용소의 대지에 대형 복합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수용자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오래된 탄약 공장 철거 작업이 시작되면서 이 노역에 동원되었다. 건설 공사는 1938년 8월 중순에 공식적으로

완료되었고, 수용소는 1945년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으며, 이리하여 다하우는 제3제국 수용소 중에서 가장

오래 운영된 수용소였다. 다하우 지역은 수용소 근처에 많은 SS 기관들이 있었다.

 

경제 및 공공 봉사 지도자 학교, SS의료학교 같은 것들이다. 그 당시 강제 수용소는 "보호 구금 수용소"(protective cusody camp)라 불렸으며, 전체 복합 시설 중에 절반 이하 정도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수용자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형상화

 

1944년 8월 여성 수용소가 다하우 내에 설치되었고, 첫 번째 여성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이송되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여성 경비대원은 고작 19명에 불과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해방때까지 수용소에서

근무했다.  이들 19명 중에서 16명의 이름이 밝혀졌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글귀가 장식된 철제문(門)

나치의 문구 차용으로 그 존귀한 의미를 조롱당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는 다하우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폴란드 아우슈비츠 문에도 치장돼 있다.

 

종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여건은 점점 악화되었다.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오면서 독일인들은 전선 근처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더 후방의 수용소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은 엄청난 수의 수감자들이 해방되는 사태를

막고자 했다. 소각된 수용소에서 다하우로 수감자들이 계속 도착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기독교 계통의 종교 성직자들이 반나치 혐의를 받아 많이 수감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3,000여명의 수도사부제목사주교 등이 수감되었다.

 

이송 며칠 후에 음식이나 물이 거의 없거나 부족했으며, 수용자들은 약해지고 피폐해져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수용소의 과밀 현상, 열악한 공중 위생 환경, 불충분한 식량, 약해진 수감자들의 상태 때문에 발진티푸스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전방으로부터 계속 이송된 새로운 수감자들 때문에 수용소는 점차 과밀해졌으며, 위생 조건은 인간 이하로 떨어져갔다.

 

왼쪽에 보이는 감시탑

 

1944년말부터 시작되어 해방되던 날까지 15,000여 명이 죽었으며, 그 중 약 절반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KZ Dachau)에서였다. 500명의 소련군 포로는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수용소 막사

 

1945년 4월 27일적십자 국제위원회의 특사 빅토르 마우어는 수용소에 들어가 음식을 분배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날 저녁

수용자들이 부헨발트에서 도착했다. 원래 4,480명에서 4800명 가량의 수감자들이 수감중이었던 곳에서 800명의

생존자들이 이송되었다. 2,300구 이상의 시체가 열차 주변 등에 버려졌다.

 

4월 28일, 항복 전날, 수용소장 마틴 바이스 SS중령은 수용소 경비병 및 관리자 대부분과 함께 다하우 수용소를 떠났다. 그날,

적십자 특사 빅토르 마우어는 수용소장 바이스의 부관 요하네스 오토 SS중위를 수용소를 포기하지 않고 미국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수감자들을 지키고 있도록 설득하고자 애썼다. 마우어는 죄수들이 대량 탈주하여 발진티푸스를 퍼뜨릴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토 SS중위는 잔류를 거부하고 달아났다.

 

희생자 기억 프로젝트 ‘발 아래의 돌’
독일은 2000년 8월 설립한 ‘기억·책임·미래 재단(EVZ)’을 통해 2차 대전 시기 나치 수용소 등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던

약 4000만명의 피해자들 중 생존해 있는 170만명에게 배상을 했습니다. 세계 100여국에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에게 배상이

이뤄진 건 마땅하지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강제노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은 기업들이 늦게나마

반성의 의미에서 출자한 돈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